2007년 04월 22일
黄昏人(황혼인) - Lost Sheep ③
대로를 똑바로 걸어가자 넓게 펼쳐진 타원형의 광장이 있고, 대신전의 입구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바로 앞에 있는 샘의 분수에서는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레테 강에서 끌어오는 듯한 그 물은 신성시되어, 신자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은총을 기도한다고 한다.
꿀에 모여드는 벌처럼 광장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피리아는 황송해하면서도 그 속을 헤치며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 하나를 남겨두고 문득 위를 보자, 거대한 여덟 개의 돌기둥이 소녀를 집어삼키듯 서 잇다. 기둥 위쪽 끝에는 기하학적으로 용을 본 뜬 장식이 달려 있고, 눈동자에 끼워진 호박석이 제도를 지켜보듯 신비로운 빛을 머금고 있다.
―――엘카이르 교는, 이 세계의 수호신인 '용족'을 신앙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밖에도 용 모양의 부조나 석상이 신전 안팎 여기저기에 보였다.
대륙 최고의 건축기술의 정수를 집대성한 이 대신전은, 약 3만을 넘는 사람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의 규모라고 한다. 제도에 들어올 때 지나온 개선문에 지지 않을 정도로 큰 입구의 크기에, 무의식중에 그 소문도 거짓말이 아니라고 납득해버렸다.
피리아는 허리둘레의 몇 배는 됨직한 거대한 돌기둥이 규칙대로 나란히 늘어선 옆쪽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면서도 어떻게든 신전의 사람에게 하데스 사제의 행방을 묻긴 했지만.
"어땠어?"
광장의 분수 근처에서 피리아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메이린이었지만 소녀의 표정을 보고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제, 저녁쯤에 신전쪽으로 한 번 오셨었다고…… 그리고 여길 나가셨다는 것 같아요. 그 다음의 행방은 모르겠다고."
침울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피리아에게, '그래……." 하고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신고는 한 거야?"
"네. 신전 쪽이 군부에 수속을 밟아 주시겠다고. 다음은 연락을 기다려달라고 하셨어요……."
교회와 군이 협력해준다면 믿음직하지만, 그래도 마냥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괴로웠다. 아아,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좋은걸까. 사제를 남겨두고 자신 혼자만 마을에 돌아가는 것은 싫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버지 대신이다. 유일한 가족 같은 것이다. 이곳에 남아 찾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좋지, 돈도 없는 데다 제도의 지리 같은 지식도 모자라고.
우두커니 선 채 고민을 거듭하는 피리아를 걱정스레 보고 있던 메이린은 무언가가 떠오르자 소녀팔을 붙잡았다.
"그렇게 됐으니 무도회에 나가는 거야, 피리아."
"……에?"
어째서, 무도회. 뭐가 그렇게 됐다는 건지 모르겠다.
의아한 눈으로 메이린을 바라본다. 다시 한 번 들었던 말을 떠올려 보지만, 역시 맥락이 잡히지 않고 혼란스러웠다. 메이린은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라도 홀릴 듯한 아름다운 미소를 짓더니, 멍한 피리아의 상태를 개의치 않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바로 옆에 우뚝 솟은 백악(白堊)의 성으로.
"헤, 에엑!? 메이린 씨, 저, 지금, 무도회에 갈 상황이."
아닌데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기분 전환이야, 기분 전환. 이대로 여관에 돌아가도 어차피 나락 끝까지 파고들어갈 기세로 침울해할 거잖아? 군인 아저씨가 찾아준다고 했으니까, 너는 모처럼의 축제고 하니 즐겨보라구."
"그런, 사제님이 힘드실 때 저만 즐길 수는 없어요."
하데스 사제가 지금 어떤 일을 당하고 있을 지 모르고, 혹시 어딘가의 범죄자에게 납치당해서 가둬져서는 '목숨이 아깝다면 돈을 내놔라'라면서 칼로 위협당할지도 모르는데, 자기 혼자만 룰루랄라 성에 갈 수 있을 리 없다.
아아, 그건 그렇고 역시 하데스 님은 유괴당하신 걸까. 피리아도 아닌데 미아가 되셨을 리는 없고, 역시 유괴 쪽이 그럴듯하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신 것이 틀림 없다.
점점 자신의 나쁜 상상에 몰두해 새파랗게 질려가는 피리아를 질책하듯 메이린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놔두면, 피리아는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풀 죽어 있을 거잖아? 너도 찾으러 가고 싶다는 거라면 말리지 않겠어. 단, 오늘은 벌써 날도 저물어서 위험하니까 안 돼. 제일 먼저 피리아가 행방불명이 될 게 뻔하니까. 찾을 거라면, 내일 찾아. 가능하면 군인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제도의 안내라도 받으면서. ……뭐어, 피리아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목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사실은 가만히 기다리는 쪽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야."
"윽……."
차례차례 급소를 찔려 변명도 하지 못하는 피리아를 한층 몰아 붙이는 메이린. 그렇지 않아도 시선을 끄는 그녀가 장황하게 말하자, 주위의 몇 명이 놀라서 발을 멈췄다.
"하지만 뭐어, 찾으러 나서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그러니까 나는 말리지 않아. 충고하는 정도로 끝낼게. 어쨌든, 오늘은 내 춤이라도 보고 마음을 가라앉혀. 걱정하는 건 알지만 사제님이 돌아왔을 때 네가 쓰러져서 앓아누워 있으면 충격 받으실 거야. 노체에 충격은 좋지 않다구."
속사포로 쏘아붙이곤, 알겠지?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점점 더 강한 어조로 말하는 메이린에게 저항할 기술 따위, 피리아가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많은 시선들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심정도 있었으리라. 정신이 들었을 땐 끄덕끄덕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메이린!"
그런 대화를 하던 때, 성 쪽에서 젊은 남녀 몇 명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을 걸어왔다. 한눈에 악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차림새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메이린과 같이 예능을 생업으로 하는 것이리라.
"제도에서도 메이린이 있는 곳은 찾기 쉽군."
"무슨 의미야?"
접근해온 이들 중 한 명이 기막히다는 듯 말하는 것을 보며 메이린은 입을 비죽였다.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대신전의 옆에 우뚝 선 백악의 성을 올려다보았다.
"칭찬하는 거라고. 그것보다 슬슬 준비해야지."
"어라, 벌써 이렇게 됐나? ……아, 피리아. 이 사람들은 나랑 같은 악단의 사람들이야. 반년 정도 전에 꼬여서 말이지, 그 뒤로 함께 여행하고 있어."
다가온 남자에게 그렇게 대답하곤, 메이린은 고개를 돌리고 그렇게 설명했다. 쭉 혼자서 무희를 해 오던 그녀였지만, 역시 혼자보다는 집단 쪽이 집객 면에서도 안전 면에서도 형편이 좋았다고 한다. 메이린을 통해 서로 소개를 나누고, 함께 성으로 가게 되었다.
"역시, 사람이 엄청 많네―……."
감동한 것일까 볼에 손을 대고 있는 메이린에게, 피리아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찬성했다.
첫째날 밤이기도 해서, 성 앞에는 많은 사람이 밀려들었다. 그곳에는 황족이나 귀족도 있어서, 자신들 평민에게는 구름 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를 한 번이라도 보려는 순수한 호기심, 어떻게 해서도 그들의 아내 자리를 손에 넣어 우아한 생활을 보내고 싶다는 희망, 욕망 등이 섞인 열기로 가득 차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황족의 안전을 위해 만전의 경계태세가 취해져 있다. 황가 직속 기사단도 존재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황국군에 의해 대책본부가 설치되어 경비의 지휘를 맡고 있다. 입장할 때의 엄격한 심사는 물론, 일반 공개라고 해도 신분이 확실치 않으면 역시 입장이 허가되지 않는 모양이다.
미리 악단으로서 추가 등록했기 때문에 입장도 비교적 쉬웠던 메이린들은 처음으로 접하는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의 편린에, 넘쳐나는 호기심과 흥분을 억누르느라 열심이었다.
다른 의미로 긴장하고 있던 피리아는 새로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갑자기 성내의 넓은 복도에서 멈춰서서,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메이린 씨…… 저기―, 역시 저."
"내 춤을 볼 때까지는 기각, 피리아."
거절하기 전에 선수를 뺏기자 우우, 하고 눈 앞에서 걷고 있는 메이린에게 원망스러운 듯한 시선을 보낸다. 그런 소녀를 보곤 짐짓 한숨을 내쉬며,
"피리아도 참, 여자아이인데 어째서 저렇게 노는 데 흥미가 없는 걸까. 보통 이런 멋있는 무도회에서 드레스를 입는 건 펄쩍 뛸 정도로 기뻐할 일인 것 같은데. 그리고 나도 지금 당장 여기서 춤추고 싶을 정도로 두근두근 하고."
하고, 귀엽게 그 곳에서 빙그르르 턴을 했다. 물색의 드레스와 긴 흑발이 따라서 둥실 부드러운 궤적을 그린다. 그 가벼운 움직임에 몇 명의 귀족 같은 신사가 시선을 돌렸다. 절대로 숙녀라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 눈에 예절에 어긋나게 비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요정과 같은 세속과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메이린의 최대 매력이었다.
"그치만…… 메이린 씨들은 그렇다 쳐도, 저까지 이런 옷을 입을 필요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시스터 차림으로 무도회에 나가면, 그거야말로 쓸 데 없이 시선을 끌 뿐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정론으로 반박당하자 피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입장 조건으로 정장이 필수였기 때문에 억지로 메이린들에게 갈아입혀진 것이다. 메이린에게 들키지 않도록 살며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린다.
감촉 좋은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복숭아색 드레스. 몸의 라인을 부각시키고 어깨를 노출한 그 디자인은 익숙치 않은 피리아는 속옷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수치를 느꼈다. 드레스 위에 레이스가 달린 숄을 어깨에 걸쳐 그 수치도 조금은 나아졌지만, 그래도 부끄럽다. 주변을 멀리 훑어보니 가슴 쪽이나 등이 크게 트인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건 수치심을 지워주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메이린이 어떻게든 자신을 기분 전환시켜주려고 하는 게 어렴풋이 전달되어서, 감사하는 기분으로 어떻게든 수치심을 누르고 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역시,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며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다.
넓은 복도에 깔린 심홍의 흉단은 부드러웠고, 높은 천정을 바라보면 구석까지 빼곡하게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보석이 박혀 있었다. 사치스러운 조명이 늘어서 있고, 오고가는 사람들도 모두들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어지럽다. 그야말로 별세계라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의연히 걷고 있는 메이린은 이 황송스러운 세계에 깜짝 놀랄 정도로 하나가 되어 있다.
공주님이라고 밝혀도 납득해버릴 것 같아…….
잠시 홀려버렸다. 다시금 메이린이 바라는 것처럼 황족이나 귀족의 측실…… 가능하면 정실이 되어 행복해지길 빌어준다. 그러니까 오늘 밤은 그녀를 응원하는 데 전념하자고 속으로 결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뭔가 다른 것에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이었지만.
길고 넓은 복도를 걸어가자 연회장이 나왔다. 악사가 연주하는 부드러운 음악에 섞여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입식 파티로 테이블 위에는 궁정 요리뿐만 아니라 각지의 명물 요리가 진열되어 있다. 소재의 상태를 잘 살려, 식욕을 돋구듯 교묘히 담긴 그것들은 먹음직스런 냄새로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희미하게 배가 고프다고 느낀 피리아였지만, 입장하자마자 식사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기 보다 메이린에게 '색기보다 식욕인 거냐'고 혼날 것 같아 어떻게든 견뎌보기로 했다.
들어온 순간, 몇 명이 말을 걸어왔지만 메이린은 그걸 전부 웃는 얼굴로 흘려 넘겼다. 그 능숙한 모습을 보고 과연 대단하다고 감탄하고 있자, 급사에게 글래스를 받아 든 메이린이 오렌지색의 액체가 담긴 쪽을 내밀어온다. 그걸 한 모금 마시자, 달콤한 감귤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메이린의 빨간 액체는 무슨 맛일까 싶어 바라보자,
"애들한테 술은 빨라."
놀림받고 말았다.
"……나랑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면서."
피리아는 애들 취급에 볼을 부풀렸지만, 그 모습이 더욱 아이들 같아 보인다는 것은 모르리라. 메이린은 미소 지으며, 시선을 피리아에게서 연회장으로 옮겼다.
"봐, 피리아. 저 하얗고 파란 제복을 입고 서 있는 사람은 분명히 황가 직속 기사단이야."
조금은 감탄하는 어조로 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기사는 제국 내에서도 확고한 지위를 소유, 어릴 적부터 기사를 목표로 목도를 휘두르는 소년은 많았으며 동경하는 부녀자들도 많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안에도 기사가 주인공인 영웅담은 셀 수도 없이 많고, 기사라는 존재에게 환상을 품는 것도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리라.
"역시 기사님은 멋있네에…… 그래도 나로서는 역시 제국군의 기사님 쪽이 취향이지만."
확실히, 피리아도 기사라는 것을 막연히 동경하는 마음은 있다.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순진하게 메이린의 시선을 따른다. 하지만 메이린의 발언에 그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그녀의 말하는 그와 황국군의 기사가 어떻게 다른 건지 모르고, 아니 애초에 황국군 이외에 기사가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의문을 담은 시선을 눈치 챈 메이린은 유창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의 기사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하나는 광가 직속 기사단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군에 소속된 기사단. 황가 직속 기사단은…… 근위기사단이라고 말하는 쪽이 이해하기 쉬울까나. 황족을 지키는 게 일이니까, 기본적으로 성 안에 배치. 로써 전원 귀족이니까 말야, 꽃가마를 노리는 거라면 안성맞춤이지만, 역시 장식품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 제국군 쪽이 능력도 인기도 높고, 입장 쪽에서도 위야. 실제로 전쟁이 나면 그들이 전선에 나서서 싸우니까, 각지의 분쟁도 그들이 맡아서 해결하고 있고. 거기에 연고가 중요한 귀족들뿐인 근위기사단이랑 달라서 제국군부는 완전한 실력지상주의니까, 평민이라도 들어갈 수 있고 재능이 있다면 확 출세할 수도 있는 거야. 보통보다 철저하다고나 할까…… 몸만이 아니라 정신이 취약하면 해먹기 힘들어. 그러니까 역시 자연히 실력에 차이가 날 수밖에. ……아, 출세한다고 해도 역시 요직은 귀족들이 점령하고 있지만."
그치만 그렇게 따지면 같은 귀족이라도 제국군 기사단의 사람 쪽이 호감이 더하다, 고 메이린은 말한다. 그 생각에 과연, 하고 납득할 새도 없이 재촉하듯 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저, 저기 검은 군복! 역시 '흑인 마법 기사단(레어시 Mage Ritter)'이 이번 경비의 지휘를 담당하고 있다는 정보가 맞았나봐."
"흑인 마법 기사단……?"
흑인, 이라는 것만으로는 전신에 검은 군복을 두른 기사가 벽을 등지고 서있다. 왠지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주위의 공기가 날카로운 듯한 느낌이 든다. 주의 깊게 주변의 상태를 살피고 있어서, 일에 열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자신들만이 드레스를 입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싫다, 설마 모르는 거야? "성인기사단(히어로 그리프 Ritter)랑 나란히 제국의 2대 기사단 중 하나야. 제국군의 톱에 선 기사님! 초엘리트 아냐……라고 해도 뭐 제국군이랑 근위기사의 차이도 모르니까, 당연한가."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 하고 약간 질렸다는 듯 중얼거리자, 피리아는 다소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피리아가 살던 마을은 상당한 지방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중앙의 소문은 어지간해선 들려오지 않는다. 또한 연장자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젊은 여자가 새된 목소리를 높여서 소문 이야기에 꽃을 피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피리아가 그런 소문에 흥미가 없다는 것이 제일 큰 원인이기도 하지만.
"대단하네요, 메이린 씨."
존경 비슷한 마음을 담아 중얼거리자, '상식이야'라면서 또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아아, 그치만 역시 소문의 흑기사님은 없네."
"흑기사님?"
검은 기사라면, 이 연회장에도 몇 명인가 있지 않은가. 그녀가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만, 오빠부대 체질인 줄은 몰랐다. 랄까, 평상시의 그녀가 언니처럼 어른스러워서 의외인 것뿐이지 이게 나이에 맞게 귀여운 것일 터다.
"저기, 흑기사님이라는 건 말야, 별명이라구, 별명. 본명은 히유우 일 류시아 님으로, 흑인 마법 기사단을 이끄는 장군님이야. 제도에서 바로 근처의 페니키아 지방을 다스리는 곡장님이고. 평판이 1, 2위를 다툴까. 지위도 명성도 있고 용모도 수려하고, 그리고 스물 세살에 독신, 쯤 되면 싫어도 주목받는 거지. 아, 그치만 약혼자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헤에."
"성인기사단의 장군인 클라바 비다 한슨 님도 남자답고 여태 독신이라 인기가 높아. 한슨 가(家)는 제도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귀족이고. 그치만 스물여덟이니까…… 피리아랑은 나이가 약간 먼가, 열 살 차이니까 말이지."
"헤에……에, 응?"
왜 거기서 자신이 나오는 걸까, 하고 순간 당황했지만 그런 피리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차례차례 연회장 안의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어때? 봐, 꽤 멋있지 않아?"
"……메이린 씨는 기사님이랑 결혼하고 싶은 건가요?"
아무래도 아까부터 기사들만 눈독 들이고 있다. 이 무도회에서 황족의 측실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라는 생각에 물어봤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 말고 피리아 너라구."
"……에, 에엑!?"
놀라서 목소리를 높이자 곧바로 쉬, 하고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올린다. 주변 몇 명의 의아한듯한 시선을 눈치 채고, 피리아는 당황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한다.
"어, 어째서 어느새 제 상대 고르기가 된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 메이린을 닦달한다.
"에? 피리아는 역시 기사님보다 황자님 쪽이 좋은 건가? 내 생각에 피리아는 기사님이랑 잘 맞을 것 같아. 왠지 분위기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좋잖아. 모처럼이니까, 피리아도 결혼 상대를 고르면 되는 거야. 이대로 평생 시스터인 채로 교회 안에서 노인이나 애들을 상대하며 끝낼 생각이야? 그런 건 여자가 손해라구, 아깝기도 해라! 아, 봐, 저쪽의 기사님도 꽤 쓸만할지도…… 그치만 피리아랑 나란히 있으면 조금 로리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게 난점이네……."
그러니까, 피리아가 조금 어리게 보이는 것도 문제라구,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또 어딘가 실례되는 말투로 감정을 계속한다. 피리아는 잠시 멍해졌지만, 당황해서 막으려고 했다.
"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메이린 씨! 그런, 고른다거나 하는 당치 않은 일이 가능할 리가 없어요, 그럴 입장이 아니에요. 애초에 그런 말투로는 기사님들에게 실례라구요."
왜 어느 틈에 이런 얘기가 되어있는 걸까 싶어 피리아는 머리가 아파져 왔다. 매일 열심히 살아가느라 결혼 따위 생각할 수도 없다. 자신처럼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소녀를, 그것도 출신도 모르는 고아에다 기억까지 잃었다는 성가신 사정도 있는 자신을 받아줄 특이한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상대가 기사라니 너무나 황송하고 과분하다, 무례한 데도 정도가 있다.
필사적으로 할 말을 죄다 꺼내는 피리아를 보며 메이린은 치―, 하고 애들처럼 입을 비죽였다.
"메이린!!"
탁탁탁 조급한 발소리를 내며 메이린에게 같은 악단의 사람이 뛰어왔다. 그렇게 서두르는 모습에 메이린도 눈을 크게 뜨고,
"왜 그래, 그렇게 서둘러서."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말을 꺼낸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피리아는 얘기의 방향이 바뀌어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변을 돌아보고 테이블 위에 있던 물이 든 글래스에 손을 뻗는다. 아까의 대화로 완전히 목이 말라버린 것이다. 혀끝을 축이자 아까까지의 당황스러웠던 마음이 급속도로 침착함을 되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에, 뭐라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됐다니?"
"그래.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상해버려서……. 가수는 그녀밖에 없는데, 곤란하게 됐어……."
"이렇게 직전에……."
"어쩔까. 노래가 없으면 조금 하기 힘든 부분도 있으니까, 곡을 바꿀까?"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두 사람에게서 약간 떨어진 피리아는 수수방관으로 서 있다. 아무래도, 사고가 일어나버린 듯하다.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자니,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던 메이린이 얼굴을 들어서 눈이 마주쳤다. 그대로, 잠시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한다. 이쪽으로 다가와서는 천천히 손으로 어깨를 잡는다.
왠지 나쁜 예감이 들었다.
레어시, 그리고 히어로 그리프는... 그냥 고유명사처럼 쓰는 것 같습니다. 저 단어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찾아보고 연구해봤는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영어나 다른 나라 말로 된 단어 아시는 분은..(없을 것 같지만) 제보바람. (Ritter는 독어로 기사라는 뜻이래요. 원래 일어 단어는 レアシマージ・リッター ヒエログリフ・リッター 랍니다.)
피리아가 여주인공인 건 확실한데, 남주는 아무래도 히유우인것 같아요.
꿀에 모여드는 벌처럼 광장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피리아는 황송해하면서도 그 속을 헤치며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 하나를 남겨두고 문득 위를 보자, 거대한 여덟 개의 돌기둥이 소녀를 집어삼키듯 서 잇다. 기둥 위쪽 끝에는 기하학적으로 용을 본 뜬 장식이 달려 있고, 눈동자에 끼워진 호박석이 제도를 지켜보듯 신비로운 빛을 머금고 있다.
―――엘카이르 교는, 이 세계의 수호신인 '용족'을 신앙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밖에도 용 모양의 부조나 석상이 신전 안팎 여기저기에 보였다.
대륙 최고의 건축기술의 정수를 집대성한 이 대신전은, 약 3만을 넘는 사람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의 규모라고 한다. 제도에 들어올 때 지나온 개선문에 지지 않을 정도로 큰 입구의 크기에, 무의식중에 그 소문도 거짓말이 아니라고 납득해버렸다.
피리아는 허리둘레의 몇 배는 됨직한 거대한 돌기둥이 규칙대로 나란히 늘어선 옆쪽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면서도 어떻게든 신전의 사람에게 하데스 사제의 행방을 묻긴 했지만.
"어땠어?"
광장의 분수 근처에서 피리아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메이린이었지만 소녀의 표정을 보고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제, 저녁쯤에 신전쪽으로 한 번 오셨었다고…… 그리고 여길 나가셨다는 것 같아요. 그 다음의 행방은 모르겠다고."
침울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피리아에게, '그래……." 하고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신고는 한 거야?"
"네. 신전 쪽이 군부에 수속을 밟아 주시겠다고. 다음은 연락을 기다려달라고 하셨어요……."
교회와 군이 협력해준다면 믿음직하지만, 그래도 마냥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괴로웠다. 아아,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좋은걸까. 사제를 남겨두고 자신 혼자만 마을에 돌아가는 것은 싫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버지 대신이다. 유일한 가족 같은 것이다. 이곳에 남아 찾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좋지, 돈도 없는 데다 제도의 지리 같은 지식도 모자라고.
우두커니 선 채 고민을 거듭하는 피리아를 걱정스레 보고 있던 메이린은 무언가가 떠오르자 소녀팔을 붙잡았다.
"그렇게 됐으니 무도회에 나가는 거야, 피리아."
"……에?"
어째서, 무도회. 뭐가 그렇게 됐다는 건지 모르겠다.
의아한 눈으로 메이린을 바라본다. 다시 한 번 들었던 말을 떠올려 보지만, 역시 맥락이 잡히지 않고 혼란스러웠다. 메이린은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라도 홀릴 듯한 아름다운 미소를 짓더니, 멍한 피리아의 상태를 개의치 않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바로 옆에 우뚝 솟은 백악(白堊)의 성으로.
"헤, 에엑!? 메이린 씨, 저, 지금, 무도회에 갈 상황이."
아닌데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기분 전환이야, 기분 전환. 이대로 여관에 돌아가도 어차피 나락 끝까지 파고들어갈 기세로 침울해할 거잖아? 군인 아저씨가 찾아준다고 했으니까, 너는 모처럼의 축제고 하니 즐겨보라구."
"그런, 사제님이 힘드실 때 저만 즐길 수는 없어요."
하데스 사제가 지금 어떤 일을 당하고 있을 지 모르고, 혹시 어딘가의 범죄자에게 납치당해서 가둬져서는 '목숨이 아깝다면 돈을 내놔라'라면서 칼로 위협당할지도 모르는데, 자기 혼자만 룰루랄라 성에 갈 수 있을 리 없다.
아아, 그건 그렇고 역시 하데스 님은 유괴당하신 걸까. 피리아도 아닌데 미아가 되셨을 리는 없고, 역시 유괴 쪽이 그럴듯하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신 것이 틀림 없다.
점점 자신의 나쁜 상상에 몰두해 새파랗게 질려가는 피리아를 질책하듯 메이린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놔두면, 피리아는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풀 죽어 있을 거잖아? 너도 찾으러 가고 싶다는 거라면 말리지 않겠어. 단, 오늘은 벌써 날도 저물어서 위험하니까 안 돼. 제일 먼저 피리아가 행방불명이 될 게 뻔하니까. 찾을 거라면, 내일 찾아. 가능하면 군인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제도의 안내라도 받으면서. ……뭐어, 피리아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목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사실은 가만히 기다리는 쪽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야."
"윽……."
차례차례 급소를 찔려 변명도 하지 못하는 피리아를 한층 몰아 붙이는 메이린. 그렇지 않아도 시선을 끄는 그녀가 장황하게 말하자, 주위의 몇 명이 놀라서 발을 멈췄다.
"하지만 뭐어, 찾으러 나서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그러니까 나는 말리지 않아. 충고하는 정도로 끝낼게. 어쨌든, 오늘은 내 춤이라도 보고 마음을 가라앉혀. 걱정하는 건 알지만 사제님이 돌아왔을 때 네가 쓰러져서 앓아누워 있으면 충격 받으실 거야. 노체에 충격은 좋지 않다구."
속사포로 쏘아붙이곤, 알겠지?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점점 더 강한 어조로 말하는 메이린에게 저항할 기술 따위, 피리아가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많은 시선들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심정도 있었으리라. 정신이 들었을 땐 끄덕끄덕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메이린!"
그런 대화를 하던 때, 성 쪽에서 젊은 남녀 몇 명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을 걸어왔다. 한눈에 악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차림새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메이린과 같이 예능을 생업으로 하는 것이리라.
"제도에서도 메이린이 있는 곳은 찾기 쉽군."
"무슨 의미야?"
접근해온 이들 중 한 명이 기막히다는 듯 말하는 것을 보며 메이린은 입을 비죽였다.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대신전의 옆에 우뚝 선 백악의 성을 올려다보았다.
"칭찬하는 거라고. 그것보다 슬슬 준비해야지."
"어라, 벌써 이렇게 됐나? ……아, 피리아. 이 사람들은 나랑 같은 악단의 사람들이야. 반년 정도 전에 꼬여서 말이지, 그 뒤로 함께 여행하고 있어."
다가온 남자에게 그렇게 대답하곤, 메이린은 고개를 돌리고 그렇게 설명했다. 쭉 혼자서 무희를 해 오던 그녀였지만, 역시 혼자보다는 집단 쪽이 집객 면에서도 안전 면에서도 형편이 좋았다고 한다. 메이린을 통해 서로 소개를 나누고, 함께 성으로 가게 되었다.
"역시, 사람이 엄청 많네―……."
감동한 것일까 볼에 손을 대고 있는 메이린에게, 피리아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찬성했다.
첫째날 밤이기도 해서, 성 앞에는 많은 사람이 밀려들었다. 그곳에는 황족이나 귀족도 있어서, 자신들 평민에게는 구름 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를 한 번이라도 보려는 순수한 호기심, 어떻게 해서도 그들의 아내 자리를 손에 넣어 우아한 생활을 보내고 싶다는 희망, 욕망 등이 섞인 열기로 가득 차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황족의 안전을 위해 만전의 경계태세가 취해져 있다. 황가 직속 기사단도 존재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황국군에 의해 대책본부가 설치되어 경비의 지휘를 맡고 있다. 입장할 때의 엄격한 심사는 물론, 일반 공개라고 해도 신분이 확실치 않으면 역시 입장이 허가되지 않는 모양이다.
미리 악단으로서 추가 등록했기 때문에 입장도 비교적 쉬웠던 메이린들은 처음으로 접하는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의 편린에, 넘쳐나는 호기심과 흥분을 억누르느라 열심이었다.
다른 의미로 긴장하고 있던 피리아는 새로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갑자기 성내의 넓은 복도에서 멈춰서서,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메이린 씨…… 저기―, 역시 저."
"내 춤을 볼 때까지는 기각, 피리아."
거절하기 전에 선수를 뺏기자 우우, 하고 눈 앞에서 걷고 있는 메이린에게 원망스러운 듯한 시선을 보낸다. 그런 소녀를 보곤 짐짓 한숨을 내쉬며,
"피리아도 참, 여자아이인데 어째서 저렇게 노는 데 흥미가 없는 걸까. 보통 이런 멋있는 무도회에서 드레스를 입는 건 펄쩍 뛸 정도로 기뻐할 일인 것 같은데. 그리고 나도 지금 당장 여기서 춤추고 싶을 정도로 두근두근 하고."
하고, 귀엽게 그 곳에서 빙그르르 턴을 했다. 물색의 드레스와 긴 흑발이 따라서 둥실 부드러운 궤적을 그린다. 그 가벼운 움직임에 몇 명의 귀족 같은 신사가 시선을 돌렸다. 절대로 숙녀라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 눈에 예절에 어긋나게 비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요정과 같은 세속과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메이린의 최대 매력이었다.
"그치만…… 메이린 씨들은 그렇다 쳐도, 저까지 이런 옷을 입을 필요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시스터 차림으로 무도회에 나가면, 그거야말로 쓸 데 없이 시선을 끌 뿐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정론으로 반박당하자 피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입장 조건으로 정장이 필수였기 때문에 억지로 메이린들에게 갈아입혀진 것이다. 메이린에게 들키지 않도록 살며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린다.
감촉 좋은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복숭아색 드레스. 몸의 라인을 부각시키고 어깨를 노출한 그 디자인은 익숙치 않은 피리아는 속옷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수치를 느꼈다. 드레스 위에 레이스가 달린 숄을 어깨에 걸쳐 그 수치도 조금은 나아졌지만, 그래도 부끄럽다. 주변을 멀리 훑어보니 가슴 쪽이나 등이 크게 트인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건 수치심을 지워주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메이린이 어떻게든 자신을 기분 전환시켜주려고 하는 게 어렴풋이 전달되어서, 감사하는 기분으로 어떻게든 수치심을 누르고 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역시,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며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다.
넓은 복도에 깔린 심홍의 흉단은 부드러웠고, 높은 천정을 바라보면 구석까지 빼곡하게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보석이 박혀 있었다. 사치스러운 조명이 늘어서 있고, 오고가는 사람들도 모두들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어지럽다. 그야말로 별세계라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의연히 걷고 있는 메이린은 이 황송스러운 세계에 깜짝 놀랄 정도로 하나가 되어 있다.
공주님이라고 밝혀도 납득해버릴 것 같아…….
잠시 홀려버렸다. 다시금 메이린이 바라는 것처럼 황족이나 귀족의 측실…… 가능하면 정실이 되어 행복해지길 빌어준다. 그러니까 오늘 밤은 그녀를 응원하는 데 전념하자고 속으로 결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뭔가 다른 것에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이었지만.
길고 넓은 복도를 걸어가자 연회장이 나왔다. 악사가 연주하는 부드러운 음악에 섞여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입식 파티로 테이블 위에는 궁정 요리뿐만 아니라 각지의 명물 요리가 진열되어 있다. 소재의 상태를 잘 살려, 식욕을 돋구듯 교묘히 담긴 그것들은 먹음직스런 냄새로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희미하게 배가 고프다고 느낀 피리아였지만, 입장하자마자 식사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기 보다 메이린에게 '색기보다 식욕인 거냐'고 혼날 것 같아 어떻게든 견뎌보기로 했다.
들어온 순간, 몇 명이 말을 걸어왔지만 메이린은 그걸 전부 웃는 얼굴로 흘려 넘겼다. 그 능숙한 모습을 보고 과연 대단하다고 감탄하고 있자, 급사에게 글래스를 받아 든 메이린이 오렌지색의 액체가 담긴 쪽을 내밀어온다. 그걸 한 모금 마시자, 달콤한 감귤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메이린의 빨간 액체는 무슨 맛일까 싶어 바라보자,
"애들한테 술은 빨라."
놀림받고 말았다.
"……나랑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면서."
피리아는 애들 취급에 볼을 부풀렸지만, 그 모습이 더욱 아이들 같아 보인다는 것은 모르리라. 메이린은 미소 지으며, 시선을 피리아에게서 연회장으로 옮겼다.
"봐, 피리아. 저 하얗고 파란 제복을 입고 서 있는 사람은 분명히 황가 직속 기사단이야."
조금은 감탄하는 어조로 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기사는 제국 내에서도 확고한 지위를 소유, 어릴 적부터 기사를 목표로 목도를 휘두르는 소년은 많았으며 동경하는 부녀자들도 많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안에도 기사가 주인공인 영웅담은 셀 수도 없이 많고, 기사라는 존재에게 환상을 품는 것도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리라.
"역시 기사님은 멋있네에…… 그래도 나로서는 역시 제국군의 기사님 쪽이 취향이지만."
확실히, 피리아도 기사라는 것을 막연히 동경하는 마음은 있다.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순진하게 메이린의 시선을 따른다. 하지만 메이린의 발언에 그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그녀의 말하는 그와 황국군의 기사가 어떻게 다른 건지 모르고, 아니 애초에 황국군 이외에 기사가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의문을 담은 시선을 눈치 챈 메이린은 유창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의 기사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하나는 광가 직속 기사단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군에 소속된 기사단. 황가 직속 기사단은…… 근위기사단이라고 말하는 쪽이 이해하기 쉬울까나. 황족을 지키는 게 일이니까, 기본적으로 성 안에 배치. 로써 전원 귀족이니까 말야, 꽃가마를 노리는 거라면 안성맞춤이지만, 역시 장식품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 제국군 쪽이 능력도 인기도 높고, 입장 쪽에서도 위야. 실제로 전쟁이 나면 그들이 전선에 나서서 싸우니까, 각지의 분쟁도 그들이 맡아서 해결하고 있고. 거기에 연고가 중요한 귀족들뿐인 근위기사단이랑 달라서 제국군부는 완전한 실력지상주의니까, 평민이라도 들어갈 수 있고 재능이 있다면 확 출세할 수도 있는 거야. 보통보다 철저하다고나 할까…… 몸만이 아니라 정신이 취약하면 해먹기 힘들어. 그러니까 역시 자연히 실력에 차이가 날 수밖에. ……아, 출세한다고 해도 역시 요직은 귀족들이 점령하고 있지만."
그치만 그렇게 따지면 같은 귀족이라도 제국군 기사단의 사람 쪽이 호감이 더하다, 고 메이린은 말한다. 그 생각에 과연, 하고 납득할 새도 없이 재촉하듯 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저, 저기 검은 군복! 역시 '흑인 마법 기사단(레어시 Mage Ritter)'이 이번 경비의 지휘를 담당하고 있다는 정보가 맞았나봐."
"흑인 마법 기사단……?"
흑인, 이라는 것만으로는 전신에 검은 군복을 두른 기사가 벽을 등지고 서있다. 왠지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주위의 공기가 날카로운 듯한 느낌이 든다. 주의 깊게 주변의 상태를 살피고 있어서, 일에 열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자신들만이 드레스를 입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싫다, 설마 모르는 거야? "성인기사단(히어로 그리프 Ritter)랑 나란히 제국의 2대 기사단 중 하나야. 제국군의 톱에 선 기사님! 초엘리트 아냐……라고 해도 뭐 제국군이랑 근위기사의 차이도 모르니까, 당연한가."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 하고 약간 질렸다는 듯 중얼거리자, 피리아는 다소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피리아가 살던 마을은 상당한 지방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중앙의 소문은 어지간해선 들려오지 않는다. 또한 연장자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젊은 여자가 새된 목소리를 높여서 소문 이야기에 꽃을 피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피리아가 그런 소문에 흥미가 없다는 것이 제일 큰 원인이기도 하지만.
"대단하네요, 메이린 씨."
존경 비슷한 마음을 담아 중얼거리자, '상식이야'라면서 또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아아, 그치만 역시 소문의 흑기사님은 없네."
"흑기사님?"
검은 기사라면, 이 연회장에도 몇 명인가 있지 않은가. 그녀가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만, 오빠부대 체질인 줄은 몰랐다. 랄까, 평상시의 그녀가 언니처럼 어른스러워서 의외인 것뿐이지 이게 나이에 맞게 귀여운 것일 터다.
"저기, 흑기사님이라는 건 말야, 별명이라구, 별명. 본명은 히유우 일 류시아 님으로, 흑인 마법 기사단을 이끄는 장군님이야. 제도에서 바로 근처의 페니키아 지방을 다스리는 곡장님이고. 평판이 1, 2위를 다툴까. 지위도 명성도 있고 용모도 수려하고, 그리고 스물 세살에 독신, 쯤 되면 싫어도 주목받는 거지. 아, 그치만 약혼자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헤에."
"성인기사단의 장군인 클라바 비다 한슨 님도 남자답고 여태 독신이라 인기가 높아. 한슨 가(家)는 제도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귀족이고. 그치만 스물여덟이니까…… 피리아랑은 나이가 약간 먼가, 열 살 차이니까 말이지."
"헤에……에, 응?"
왜 거기서 자신이 나오는 걸까, 하고 순간 당황했지만 그런 피리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차례차례 연회장 안의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어때? 봐, 꽤 멋있지 않아?"
"……메이린 씨는 기사님이랑 결혼하고 싶은 건가요?"
아무래도 아까부터 기사들만 눈독 들이고 있다. 이 무도회에서 황족의 측실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라는 생각에 물어봤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 말고 피리아 너라구."
"……에, 에엑!?"
놀라서 목소리를 높이자 곧바로 쉬, 하고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올린다. 주변 몇 명의 의아한듯한 시선을 눈치 채고, 피리아는 당황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한다.
"어, 어째서 어느새 제 상대 고르기가 된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 메이린을 닦달한다.
"에? 피리아는 역시 기사님보다 황자님 쪽이 좋은 건가? 내 생각에 피리아는 기사님이랑 잘 맞을 것 같아. 왠지 분위기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좋잖아. 모처럼이니까, 피리아도 결혼 상대를 고르면 되는 거야. 이대로 평생 시스터인 채로 교회 안에서 노인이나 애들을 상대하며 끝낼 생각이야? 그런 건 여자가 손해라구, 아깝기도 해라! 아, 봐, 저쪽의 기사님도 꽤 쓸만할지도…… 그치만 피리아랑 나란히 있으면 조금 로리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게 난점이네……."
그러니까, 피리아가 조금 어리게 보이는 것도 문제라구,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또 어딘가 실례되는 말투로 감정을 계속한다. 피리아는 잠시 멍해졌지만, 당황해서 막으려고 했다.
"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메이린 씨! 그런, 고른다거나 하는 당치 않은 일이 가능할 리가 없어요, 그럴 입장이 아니에요. 애초에 그런 말투로는 기사님들에게 실례라구요."
왜 어느 틈에 이런 얘기가 되어있는 걸까 싶어 피리아는 머리가 아파져 왔다. 매일 열심히 살아가느라 결혼 따위 생각할 수도 없다. 자신처럼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소녀를, 그것도 출신도 모르는 고아에다 기억까지 잃었다는 성가신 사정도 있는 자신을 받아줄 특이한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상대가 기사라니 너무나 황송하고 과분하다, 무례한 데도 정도가 있다.
필사적으로 할 말을 죄다 꺼내는 피리아를 보며 메이린은 치―, 하고 애들처럼 입을 비죽였다.
"메이린!!"
탁탁탁 조급한 발소리를 내며 메이린에게 같은 악단의 사람이 뛰어왔다. 그렇게 서두르는 모습에 메이린도 눈을 크게 뜨고,
"왜 그래, 그렇게 서둘러서."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말을 꺼낸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피리아는 얘기의 방향이 바뀌어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변을 돌아보고 테이블 위에 있던 물이 든 글래스에 손을 뻗는다. 아까의 대화로 완전히 목이 말라버린 것이다. 혀끝을 축이자 아까까지의 당황스러웠던 마음이 급속도로 침착함을 되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에, 뭐라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됐다니?"
"그래.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상해버려서……. 가수는 그녀밖에 없는데, 곤란하게 됐어……."
"이렇게 직전에……."
"어쩔까. 노래가 없으면 조금 하기 힘든 부분도 있으니까, 곡을 바꿀까?"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두 사람에게서 약간 떨어진 피리아는 수수방관으로 서 있다. 아무래도, 사고가 일어나버린 듯하다.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자니,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던 메이린이 얼굴을 들어서 눈이 마주쳤다. 그대로, 잠시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한다. 이쪽으로 다가와서는 천천히 손으로 어깨를 잡는다.
왠지 나쁜 예감이 들었다.
레어시, 그리고 히어로 그리프는... 그냥 고유명사처럼 쓰는 것 같습니다. 저 단어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찾아보고 연구해봤는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영어나 다른 나라 말로 된 단어 아시는 분은..(없을 것 같지만) 제보바람. (Ritter는 독어로 기사라는 뜻이래요. 원래 일어 단어는 レアシマージ・リッター ヒエログリフ・リッター 랍니다.)
피리아가 여주인공인 건 확실한데, 남주는 아무래도 히유우인것 같아요.
# by | 2007/04/22 20:31 | [NEWVEL]황혼인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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